라오스 역사
최근 수정 날짜 : 2024-07-16
고대 및 식민시대
라오족은 8세기경부터 중국 남부로부터 하천을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13세기경 몽골의 세력 확대에 따라 라오족을 포함한 태국계 민족들의 이동이 가속화되면서 각지에 므앙(Meuang)이라 불리는 호족 정치체가 성립되었습니다.
라오계가 건국한 국가는 현재의 태국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한 '란나' 왕국과 루앙프라방을 중심으로 한 '란쌍' 왕국(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입니다. 란나 왕국이 쇠퇴하면서 1353년 세워진 란쌍 왕국이 라오스의 대표 왕국이 되었습니다.
란쌍 왕국은 한때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면적이 큰 왕국 중 하나였으며 현재의 태국 동북부 지역까지 이르렀으나, 후계를 둘러싼 내분과 미얀마, 베트남, 태국의 침략으로 인해 서서히 쇠퇴하였습니다. 18세기 초에는 루앙프라방(북부), 비엔티안(중부), 참파삭(남부) 왕국으로 분열되어 태국의 영향권에 놓였습니다.
비엔티안 왕국은 1820년대에 참파삭과 연합하여 태국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여 비엔티안까지 유린당하고 한때 태국 영토에 편입되었습니다. 현재 방콕의 왕궁 사원에 있는 에메랄드 불상은 이때 비엔티안에서 약탈되었습니다. 19세기 말엽까지 루앙프라방 왕국만이 태국의 속국으로서나마 국가의 형태를 유지했습니다.
1893~1907년 사이에 맺어진 프랑스-태국 간 조약에 따라 프랑스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인 현재의 라오스 영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잠시 일본의 군사 점령 하에 있다가 1954년 프랑스와 라오스 간의 조약에 따라 완전 독립하였습니다. 식민화 과정에서 루앙프라방 왕국은 보호령, 여타 라오스 지역은 직할 식민지로 구별되어 통치를 받다가 프랑스 패퇴 후인 1946년경 독립선언과 함께 루앙프라방 왕을 전체 라오스 국왕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독립 후
독립 후에도 국내의 좌파, 중립파, 우파의 대립이 계속되었고 인도차이나 전쟁을 둘러싸고 열강까지 개입하여 내전이 이어졌습니다. 1962년 제네바 조약의 성립으로 연립정부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고 친서방의 비엔티안 정부(왕정)와 좌파 '빠텟 라오'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습니다.
1973년 미국-베트남 간의 파리평화협정 성립과 함께 라오스에서도 정전협정이 맺어져 연립정부가 들어섰으나, 그 후 1975년 인도차이나 반도 정세가 급변하면서 라오스에서도 빠텟 라오가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1975년 8월 라오애국전선은 비엔티안 정부 측을 제압하고 무혈 혁명에 성공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왕정을 폐지하고 '라오인민민주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그 후 라오스는 카이손 폼비한(Kaysone Phomvihane) 라오인민혁명당 서기장 겸 총리의 지도 하에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1986년 라오인민혁명당 제4차 전당대회에서 경제개방 및 시장경제 원리를 주축으로 하는 신경제제도(NEM, New Economic Mechanism)를 도입하였습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 은행제도 및 세제개혁, 외국인 투자 유치법 제정 등을 시행하였습니다.
1991년 태국과 안보협력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1991년 8월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이 헌법에 따라 1992년 12월 최초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라오스 헌법은 혁명 15주년을 기념하여 제정된 것으로, 기본 이념은 제5차 전당대회의 노선을 답습하여 일당제 유지를 고수하고 있으나, 라오스가 근대 법치국가로서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라오스의 국부 격인 카이손 폼비한 전 총리는 헌법 문안에 큰 영향을 미쳤고, 과거 의전적 지위에 불과하던 국가주석의 권한이 헌법에 따라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카이손 전 총리는 헌법 채택 직후(1991년 8월) 국가주석직을 이어받았으나, 1992년 11월 사망하였습니다.
1994년 라오스 비엔티안과 태국 농카이를 잇는 '라오-타이 우정의 다리'가 건설되었습니다.
1995년 미국은 20년간 지속된 원조 봉쇄를 해제했습니다.
1997년 아세안 가입을 국회에서 비준하고, 아시아 금융위기로 라오스 통화인 킵(Kip)의 가치가 폭락하였습니다.
1998년 캄타이 시판돈(Khamtay Siphandone) 총리가 제4대 국가주석에 당선되었습니다.
2000년 수도인 비엔티안에서 공산화 25주년 기념행사 개최 중 폭탄 테러가 수차례 발생했습니다.
2000년 라오스 중앙정부는 지방 분권을 실시하여 지자체의 자치권 및 예산권을 보장하였습니다.
2001년 3월 캄타이 시판돈 국가주석이 재선에 성공하였고, 4월 IMF로부터 4,000만 달러의 자금을 대출받았습니다. 12월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은 라오스 내 7만여 명의 영양실조 어린이들을 위한 3개년 개선 방안을 시행하였습니다.
2004년 4월 세계은행으로부터 남튼 수력발전용 댐 건설 프로젝트를 위한 대출을 승인받고, 11월 아세안 의장국으로서 비엔티안에서 아세안 정상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나라 국가원수 최초로 라오스 방문). 같은 달 미국은 라오스에 대해 기존 제재 목적의 추가관세제도를 폐지하고 정상교역관계(NTR, Normal Trade Relations) 지위를 부여하였습니다.
2006년 춤말리 사야손(Choummaly Sayasone) 부주석이 당서기장 겸 제5대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캄타이 시판돈 국가주석과 춤말리 사야손 국가주석은 모두 국방장관 출신입니다.
2010년 4월 중국 정부와 라오스 정부는 중국 윈난성에서 수도 비엔티안까지 이르는 421km 길이의 고속철도 건설 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사업규모 약 60억 달러). 12월 부아손 부파반(Bouasone Bouphavanh) 총리가 가정문제로 사임하고 통싱 탐마봉(Thongsing Thammavong) 국회의장을 총리에 임명하였습니다.
2011년 1월 비엔티안에 증권거래소가 개설되었습니다.
2011년 6월 춤말리 사야손 국가주석이 국회에서 재선을 승인받아 임기가 5년 연장되었습니다.
2012년 7월 미 국무장관으로는 최초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라오스를 방문했습니다.
2012년 11월 비엔티안에서 제9차 ASEM 정상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김황식 국무총리 참석).
2013년 WTO에 정회원으로 가입하였습니다.
2014년 5월 라오스 씨엥쿠앙주에서 군용기 추락 사고가 발생하여 당시 국방부 장관(당서열 7위), 공안부 장관(당서열 12위), 비엔티안 시장(당서열 14위), 당 선전위원장(당서열 16위) 등이 사망하였습니다.
2016년 1월 제10차 라오인민혁명당 전당대회에서 부주석이던 분냥 보라칫(Bounnhang Vorachith)이 당서기장에 임명되었으며, 2016년 4월 개원한 국회에서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습니다.
2016년 9월 아세안 의장국으로서 비엔티안에서 제28차 아세안 정상회의 및 동아시아정상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박근혜 대통령 참석). 당시 미국의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오바마 대통령이 라오스를 방문하여 라오스 내 베트남전 불발탄(UXO) 제거를 위해 9천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하고 양국 정상은 양국 관계를 포괄적 동반자 관계로 승격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2016년 12월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보텐(북부 중국과의 접경 도시) 간 총길이 414km의 고속철도 건설이 착공되었으며, 2021년 12월 3일 정식 개통되었습니다.
2021년 1월 제11차 라오인민혁명당 전당대회에서 총리이던 통룬 시술릿(Thongloun Sisoulith)이 당서기장에 임명되었으며, 2021년 3월 개원한 제9대 국회에서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판캄 비파반(Phankham Viphavanh) 총리와 함께 신정부를 구성하였습니다.
2022년 12월 제4차 정기국회에서 판캄 비파반 총리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손싸이 시판돈(Sonexay Siphandone) 상임부총리를 총리에 임명하였습니다.